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선포하고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말하고 표면으로는 독립국가로서 새 출발을 하는 듯하였으나, 러시아 제국 등의 외세에 의존하려는 태도는 여전하였고, 민간에서는 민족의 각성을 촉구하는 각종의 정당, 사회, 교육단체 및 언론기관 등이 생겨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진행하였으나 기울어지기 시작한 나라의 정세는 바로 잡을 수가 없었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한반도에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을 밀어내고 대한제국에서의 이권을 차례로 독점해 가며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라 불리는 치욕스러운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었으며 한일 병합 조약이 1910년 강제로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이 대한민국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한제국의 멸망 원인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당독재로, 중국 야욕론, 당파성론 등이 가장 큰 일들로 꼽힌다.
일당독재론은 숙종이후 집권한 노론의 일당독재 혹은 안동 김 씨, 풍양 조 씨, 여흥 민 씨 등 소수 문벌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 등으로 새롭고 참신한 인재의 채용을 단절하고 부정부패한 것이 조선의 국력약화를 크게 가져왔다는 의견들이 분분하다.
다음으로는 중국 야욕론인데 한국의 역사학자 이정식은 이홍장의 야욕이 대한제국은 물론 청나라의 멸망의 원인으로 지목하였으며 이정식에 의하면 이홍장은 서양 각국으로 하여금 한국과 관계를 맺도록 하여 일본과 러시아가 한국을 독차지하지 못하도록 할 능력이 있었다고 보았다. 이홍장이 한국에 대한 야욕을 품지 않고 주일청국대사관 참찬관 황쭌센이 1880년 조선책략에서 지적했던 정책을 따르고 중구구 내부의 개혁을 추진했더라면 청나라와 대한제국의 붕괴를 상당기간 지연시킬 수 있었다고 비판하게 되었다.
당파성론은 한민족의 민족성은 분열성이 강하여 항상 내분하여 싸웠다고 중하는 것인데 한민족의 병적인 혈연 학연 지연성과 배타성 그리고 당벌성이 역사현실로 반영되어 당쟁 주의를 가지고 서로의 이해를 두고 배격하는 사당의 정쟁으로 간주하여 정책 대결이 아닌 정권쟁탈전에 집착하여 정치적 혼란, 사회적 폐단을 유발하였기에 이로 인해 조선왕조가 멸망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조선의 붕당정치가 후기에 갈수록 변질 되었으나, 일제가 주장한 당파성론은 변질된 붕당정치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확대 해석한 것이며, 조선의 붕당은 오히려 왕의 권력남용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정당과 유사한 기능을 가짐으로써 매우 발전된 정치형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며, 정치집단의 형성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어왔던 것이며 현재 알려진 사실도 식민사학자에 의해 과장되고 왜곡된 점이 많다. 변질된 붕당정치를 억제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했지만, 정조 사후 오히려 세도 정치의 등장이라는 부작용도 생겨나게 되었으나 이는 단점만을 부각하여 크게 확대해석하게 만든 건이고 오히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인 일제의 침략을 가리기 위해 역사를 왜곡한 사실의 지나지 않는다.
대한제국 또는 대한국,구한국은 1897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존재했던 제국으로 조선을 계승한 국가이자 한반도의 마지막 전제군주국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대한제국이 존재했던 기간과 그 주변 기간을 합쳐 구한말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1897년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 수립 선포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여러 개혁을 시도했고, 자주적 국가가 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 제국에게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이후 1910년 8월29일 일본과 체결한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일본제국과의 승인을 거쳐 병합하여 대한제국은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나 이는 군대와 무력이 강압적으로 만들어낸 폭력 비평등조약이었다. 대한제국의 정궁은 덕수궁과 경복궁이며, 중요한 행사는 경복궁이지만, 일반적으로 황실의 생활공간은 덕수궁으로 나누어 사용하게 된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을 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국호를 대한국,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초대 황제로 즉위하게 되면서 자주적 국가임을 선포하고자 하였다. 1882년부터 사용하던 태극기를 국기로 정하고, 국장을 이화문으로 하였으며, 애국가를 국가로 하였다. 대한제국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한층 강하게 표방하고자 사용된 의례상, 의전상 국호로, 대한제국의 국명은 '대한'이다. 대한이라는 말은 삼한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틀어서 삼한이라 불렀는데 삼한이 통일되었다는 의미로 대한이라 했다고 한다. 대하제국의 국호의 어원을 설명하는 내용에서 나오는 마한, 진한, 변한 은 4세기 이전 한반도 남부의 삼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10세기의 후삼국 시대의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를 가리킨다. 뒷 문장에 마한, 진한, 변한 이 고려에 이르러서 통합되었다는 구절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호를 변경하면서 제국이라고 선포하였기에 제가 더해져 대한제국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쓰인 대한이라는 이름은 1919년 4월 11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다시 흥해보자는 뜻으로 국호로 재사용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치게 되면서 1948년 8월 15일에 정식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따라 오늘날의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국호에도 여전히 사용하며 이어오게 된 것이다.
세계 각국은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대한제국을 직접으로 혹은 간접으로 승인하면서 러시아 제국와 프랑스는 국가 원수가 직접 승인하고 축하하였으며 영국, 미국, 독일도 간접으로 승인하는 의사를 표시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서부 열강 대부분은 대한제국의 성립을 그다지 반기지는 않았다.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자리에 오른 고종은 바로 11월 12일 미루어 두었던 명성황후의 국장을 치르고 과거에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의 주요한 상징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고 11월 20일 빠르게 완공하였다.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입법기관인 교전소를 설치하고 원로대신 다섯 명과 박정양, 이완용, 서재필, 탁지부 고문 영국인 존 브라운, 법부고문 샤를 르장드르를 위시한 외국인 고문관들을 교전소 부총재와 위원으로 배정했으나 교전소 위원이 친미개화파와 외국인이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자 원로대신들이 꺼리는 바람에 이 일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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