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1873년 음력 11월 친정을 선포하면서 10년간 정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를 필두로 한 여흥민씨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통상 개화론자들이 대두되면서 조선의 대외정책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1875년 음력 9월20일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면서 조선에게 문호를 개방하라고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조선 내부에서는 찬반의 다른 의견으로 엇갈렸으나 결국 개항을 찬성하는 의견들의 입지가 강화되고 1876년 음력 2월3일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고종은 또한 일본에 파견한 수신사 김홍집이 귀국할 때 가져온 사의조선책략이라는 책을 읽고 싶은 인상을 받게 되면서 조선 조정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을 등용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후에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활발한 교역을 이어갔다.
개화정책을 전담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통리기무아문을 두었고,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게 되었다. 1880년 음력 10월 11일 미국과 국교를 열었으며, 연달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의 대국들과 외교 관계를 맺어갔다. 후에 이들과 맺은 조약들이 모두 치외 법권을 규정하고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처를 거의 취할 수 없는 불평등 조약들이란 사실이 명확해졌다. 개화정책에 대하여 보수적인 유생들 가운데서도 일부 혁신적 인물들은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 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기도 하고 개화운동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임오군란은 1882년 음력 8월에 건우가 주도한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구식 군인에 대한 정부의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구 훈련도간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항쟁운동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시작하였으나, 점차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의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갑신정변은 1884년 12월 4일은 김옥균,박영효, 홍영식 등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촉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며,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을 말한다. 이 정변은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무너지게 되었으며,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 사건이다.
- 갑오개혁
조정의 개화 정책 추진과 유생들의 위정 척사 운동은 점점 격양되면서 외세의 침략 경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욱이 근대 문물의 수용과 배상금 지불 등의 여러 사건으로 재정이 어렵고 농민에 대한 탈취가 심해졌고, 일본의 경제적 침탈로 농촌경제가 파괴되어 갔다. 이런 여러 가지 일들로 농민층의 불안과 불만이 점점 커져갔고 정치,사회에 대한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들 사이에 사회 변혁의 욕구가 높아져 갔다. 인간 평등과 사회 개혁을 주장한 동학은 당시 농민들의 변혁 요구에 맞는 것이 되었고, 농민들은 동학의 조직을 통하여 대규모의 세력을 확장해 갔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고부에서 일어난 동학 농민군은 보국안민과 제포구민을 내세우고 전라도 일대를 공략한 다음 전주를 점령하게 되었고 이때가 1894년이었다. 농민군은 조정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산발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며 개혁을 실천해나가게 되었다. 조정의 개혁이 부진하고 일본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농민군은 외세를 몰아낼 목적으로 다시 일어났고 서울로 북상하게 되었다. 공주를 점령하려 한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근대 무기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지게 되면서 지도부가 체포되고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파병을 원조했다는 명분으로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고, 심지어 서로 무력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를 청일전쟁이라 부른다. 일본은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을 겁박해 친일적 개혁을 이루게 되는데 이를 갑오개혁이라 부르게 되었다.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 전쟁으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라는 명분으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지배권을 빼앗게 되었고, 요동반도를 할양받아 만주 침략의 발판을 세우게 되었다. 이를 시모노세키 조약이라 칭한다. 이에 불안을 느끼게 된 러시아는 독일와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 대한 삼국간섭을 시도하게 되었으며, 고종은 미국, 러시아 등과 가까운 김윤식, 이범진 등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반일정책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삼국간섭을 받은 일본은 요동 반도를 잃게 되었고, 남하하는 러시아는 조선에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면서 위기감을 느낀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흥선대원군을 추대하여 조선에 친일 정권을 세우고자 일본군 수비대와 대륙낭인 등을 집합시켜 몰래 경복궁에 난입하여 당시 친러시아파인 명성황후를 암살하는 일미사변이라는 참담한 사건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1895년 음력 8월에 일본의 강요에 따라 김홍집을 내각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조정 내각이 구성되면서 김홍집 내각의 개혁 정책 중 하나인 단발령은 전국에 있는 유생들과 백성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당시 신체발부 수지부모 라 하여 머리카락이나 수염등을 자르는 것을 항상 중하게 여겼던 유생들에게는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어머니와 같이 여긴 나라의 국모였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미국인과 러시아에게 목격되어 국제 문제로 대두 되었고,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피해 갈 수 없었던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암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증거 불충분임을 판시하고 보여주기식 재판으로 전원 무죄를 선고하여 석방 시키며 일단락 시켰다. 이런 일들로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에 달했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고 친일파와 일본의 상인 혹은 어인 등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게 되었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고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서울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나 1897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몇달 후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조선이란 국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수모를 겪었고, 일본으로부터 독립해 자주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단일 국가로 일어나길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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