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왕위에 오른 당시, 조정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과 그들을 몰아내고 다시 집권할는 소론으로 나누어지면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극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상황의 당파 싸움에 영조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조정을 어지럽히는 당쟁을 타파하기 위해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기용하는 한편, 통치 이념으로 탕평론을 채택하게 되었다. 탕평이란 정치를 할 때 편과 당을 쫓지 않고 지극히 중립적이고 신념에 따라 올바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탕평책은 영조 때 정국 운영의 가장 큰 원칙이 되어갔다. 영조는 노론을 한 사람 등용하면 상대 자리에는 소론을 등용하는 쌍거호대를 실시하는 것으로 탕평책을 실천했다.
영조의 노력으로 탕평정치는 그의 손자인 정조에게로 이어지게 되었다. 정조의 아버지이자 영조의 아들이었던 사도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 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할아버지인 영조의 탕평정치 의지를 받들어 더욱 발전시켜 나갔는데, 주요 조치를 살펴보면 대신 한 사람이 정승을 고발하거나 풍문에 의거하여 탄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당시 대간을 이용해 상대당의 수뇌를 공격하는 파당의 전통적인 관행을 없애기 위한 조치였다고 본다. 당시 붕당 조정의 주요 통로였던 인사권이 임금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조정에서 당파의 영향력을 줄이고 왕과 대신들이 조정의 주도권을 확보해 나가야 했다. 그리고 연좌법과 대역죄 적용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대역죄를 빙자해 다수의 상대당 인물을 일시에 탄핵하는 관행이 없어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조정에서 대신들이 당파를 지목하거나 당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금지함으로써 파당의식 자체를 없애려고 노력하였다. 규장각을 붕당의 몸집만 불려지는 것을 막고 왕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게 되었다. 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신진 사대부들과 중. 하급 관리들 가운데서 능력 있는 자들을 재교육시키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서거하고 그의 아직 어린 아들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하여 안동 김씨 집안의 세도정치가 시작되게 되었다. 이후에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친 안동 김 씨와 풍양 조 씨 등 외척 세력의 세도 정치가 60년 동안 계속되게 되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으로 일시적으로 암흑기를 가졌던 당쟁과 일당독재체제는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왕들이 연이어 등극함에 따라 절대적인 왕권이 사라지면서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의 형태로 변질 되게 되었아. 이와 같이 선조 이후 오랫동안 조선의 정치권력의 기본 구조였던 붕당정치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되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순조 때에 정권을 잡았던 안동 김 씨 세력은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풍양 조 씨 집안에게 잠시 권력을 내주면서 철종이 왕위에 오르고 다시 정권을 잡아 세도를 잡게 되었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약해져 갔고 백성들은 물론 왕족들마저도 안동 김 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 형태는 세도정치의 온갖 부정부패를 만들었고 진정, 군정, 환곡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을 초래하게 되었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고 이에 대항하는 백성들의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나, 철종 때의 진주민란 등이 있다.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도하에 수많은 몰락한 백성들과 농민들의 영세농들이 참가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 때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나라의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으며, 홍경래의 난 후에도 민란은 계속 이어지게 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그럼에도 세도 정권의 탐학과 황포는 날로 심해졌고 재난과 질병들이 거듭되어 갔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들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가게 되었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그다음 해의 콜라라의 창궐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참담한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 피해는 그 뒤 오랫동안 계속 이어졌으며, 굶주려 떠도는 백성들이 거리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다. 일련의 사건들을 전후하여 천주교가 전래하였으나 나라의 인정되지 못하고 박해를 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집권기
철종의 뒤를 이어 흥선군 이하응의 어린 둘째 아들이 순조의 양자로 하여금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습니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정권을 잡자마자 가장 먼저 나라를 엉망으로 만든 세도 정권을 무너뜨리게 디었고 민중들의 원망을 사고 있던 조세 제도를 개정하게 되었다. 가장 문제가 많던 환곡 제도를 사창제로 전환시켰고, 군역 제도를 고쳐 양반에게까지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여 민심은 안정시키려 노력하게 되었다. 붕당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사액서원을 제외하고 서원들을 대부분 철폐하여 유생들의 불만을 하게 되었다. 나아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비변사를 폐지 수준으로 축소시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회복시키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바로 세워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하였고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법전을 재정비하였다. 재정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서 없어진 경복궁을 재건하는 데 재정을 많이 투입하게 되었다. 경복궁의 재건 외에도 의정부, 종묘, 종친부, 육조 이하 각 관서 및 도성, 북한산성의 수축도 함께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황폐해졌던 서울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지만 수많은 백성들이 세금과 강제 노동 그리고 당백전으로 엄청한 인플레이션에 큰 고통을 겪었다.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 서양 오랑캐가 쳐들어왔는데 싸우지 않으면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로 화친해야 하며 화친을 주장하게 되면 이는 곧 나라를 팔아넘기는 것이라 적혀 있는 척화비가 전국 각지에 세워지게 되었다. 이후에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서양과의 교역을 단호히 거부하는 흥선대원군의 집권 시절에는 외세가 감히 침범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정책은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잡아 민생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전통 체제 안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문호 개방을 늦추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로마 가톨릭을 탄압하면서 프랑스인 신부들을 처형한 것을 구실 삼아 1866년,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해 강화도를 공격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조선에 대해 사과와 손해 배상, 통상을 요구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서울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조선군은 여러 곳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쳤고, 프랑스군은 수많은 재물을 약탈한 뒤 철수하게 되었으며 이를 병인양요라 부른다. 이로부터 5년 뒤, 이번에는 미국이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는데 1866년 미국 상인 대동강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배가 불에 탄 사건을 추궁하고 사과와 통상 교섭을 요구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이들의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미군은 강화도를 공격하는 계기로 삼았다. 조선군의 끈질긴 저항에 못 이겨 결국 물러가고 말았으며 이를 신미양요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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