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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조선, 왜와의 관계

by wanibini 202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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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옛 궁의 모습

 

1592년,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내부 갈등을 통합해야 할 필요를 느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온 사건을 임진왜란이라고 한다. 조선은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대규모 조총 부대를 전면에 준비한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여 선조가 서울을 떠나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그러나 한 번도 패배하지 않고 일본 수군을 대 격파한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에 의해 일본 육군은 보급이 끊기다시피 하여 곤란을 겪었고,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조선은 7년 만에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대승리해 몰아낼 수 있었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일본과 두 차례의 전쟁을 겪은 후 피폐해진 국토를 정비하기 위해 사림 정치를 배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들을 매일 훈련시켜 국방을 강화하였고, 호적을 다시 정비했으며, 전쟁 기간의 불에 탄 사고를 재정비했다. 또한 실리를 중시한 외교를 펼쳐, 새롭게 떠오르는 청나라와 망해가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에 의해 정계에서 배제된 서인과 남인은 권력을 획책하기 위해 연합하여 광해군을 몰아내어 인조를 옹립하였다. 이를 인조반정이라 한다. 사림파의 지지를 받고 즉위한 인조는 다시 명나라와의 친선 정책을 펼쳤고, 이에 자극받은 청나라는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패하여 청나라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청나라를 대국으로 섬기게 되었다.

 

한편 이와 같이 조선 사회 자체의 모순과 분열 대립에 곁들여, 7년에 걸친 정묘 왜란과 병자 호란으로 대대적인 침략, 파괴 행위로 그 피해는 막심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가 재정은 고갈되었으며, 백성들은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하였다. 이렇게 파탄에 직면한 사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병제와 세제의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백성들에 대한 부당한 과세가 일반화되었고 가난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농촌 사회는 극도로 피폐하게 되어가고 정부에 대한 반항 의식을 일으켰으며 조선은 점점 나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란이 계속되고, 붕당이 심해지는 이 시디에도 의학자 허준은 동의보감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 책은 1597년과 1698년에 발간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동의학을 기준으로 하여, 대부분 의학서를 참고하고 만들었다. 다양한 약재와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다. 

 

병자호란이 종전되고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게 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실제로는 은밀하게 국방 강화에 힘을 기르고 있었고 청나라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북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효종은 청나라를 혐오하여 강력히 배척한 송시열, 이완 등 주전파를 중용하여 군대를 대량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이러한 북벌론은 1659년 출병 직전 효종이 서거하자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효종 이후에도 남인을 중심으로 청나라의 정세 변화를 살펴봐서 북벌 움직임이 다시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효종 때와는 달리 한시적인 현상이었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북벌은 어렵다는 판단하에 계속 보류되어 결국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후 북벌론 병자호란 때에 자신들이 자초한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던 서인들이 책임을 회피하고 남인들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들의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지만, 전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부 세계와의 고립을 초래하여 고립화의 길을 걸어 조선 사회의 낙후를 가속화하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중국을 지배한 뒤 국력이 크게 올라가 화포, 자명종, 만국지도 등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써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는 청나라를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에 이르게 되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갖게 된 서인들의 정치력은 근본적으로 지주제에 토대하였기에, 그들의 개혁안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는 것이었다. 따라서 서인 정권은 기층 사회의 움직임에 미봉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서인 정권의 위기는 겉으로는 남인 측의 도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서인이 주도하는 정국에서도 남인은 꾸준히 진출하였다. 현종의 스승이었던 윤선도가 남인 계열로써, 오랫동안 야당적 입장에 머물러 온 남인의 지위를 부상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남인들은 서인 정권이 추구한 개혁의 부당성과 북벌 운동의 무모함을 지적하면서 예송을 일으켜 서인들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더구나 예송이 정체 문제와 관련을 가지면서 두 정파 간에 심각한 갈등을 자아내게 되면서 예론을 중심으로 한 붕당 사이의 대립은 예의 문제가 당시에는 사회질서의 기본적인 규범이었기 때문에 붕당정치의 필연적인 귀결이 되어 갔다.

 

예송은 효종과 인선왕후의 국상에서 자의 왕대비의 복제 문제를 계기로 일어났는데, 차남으로서 왕의 대를 이은 효종을 적통의 왕제로 보느냐 안 보느냐의 시비가 되었다. 1659년의 1차 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1674년의 2차 논쟁에서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인의 정치적 지위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나 경신환국에 의하여 1680년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 정권이 다시 수립되면서 붕당 사이의 대립 양상은 크게 달라져 가게 되었다. 다시 집권한 서인은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의 재기를 막기 위해 시작했다. 서인은 아예 남인을 완전히 축출하자는 노론과 남인과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론으로 분열되었으며, 두 세력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의 반전이 거듭되었으며, 이로 인해 견제와 균형, 공론에 토대한 붕당정치의 기본 원리는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 자체를 아예 인정하려 들지 않는 일당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나기 위해 시작하게 되었다. 상대당에 대한 보복으로 사사가 빈번하였고, 정쟁의 초점이 왕위 계승 문제로 비화하는 등 붕당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게 되자, 숙종은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를 하는 환국을 일으키며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을 자주 교체하게 되었으며, 그런 잦은 환국은 경종 때에 이르는 동안에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는 결과까지 발전하였고, 경종 때에는 왕세자가 된 연잉군의 대리청정 문제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치적인 방향은 사회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독점하려는 경이 커지게 되었다. 정치적 중심점도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문제여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에서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되어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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