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치는 유교의 한 갈래인 성리학을 지배 이념으로 삼았다. 사대부를 근본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로서 운영되었다. 조선의 왕은 이론적으로 전제군주의 지위를 지녔으며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양반 관료와 타협하여 정치를 운영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왕권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양반 관료와 타협하여 정치를 운영하였으며 초기에 훈구파와 사림파로 나뉘어 갈등을 보였으나 중기 이후 사림파가 득세하였고 이후 여러 정파로 나뉘어 경쟁하는 붕당 정치를 형성하게 되었다.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사색당파로 굳어지던 붕당 정치는 성리학의 학풍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어 예송논쟁이나 호락논쟁과 같은 주제가 정치의 확연히 다른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세도 정치가 등장하면서 붕당 정치 체제는 쇠락하여 갔다. 조선의 군사는 초기 오위 체계로 편성되다가 이후 지역을 거점 중심으로 방어 체계를 달리 구축하면서 진관제와 이를 보완하는 제승방략을 핵심으로 하게 되었다. 이런 전략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급작스런 외침에 맞서기 어렵다는 점이 부각되어 훈련도감을 시작으로 오군영의 중앙군을 두고 각도에 속오군을 두어 지방을 방어하는 현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고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되었던 비변사가 상설화 되면서 의정부를 넘어서 실질적인 목적의 정치 의결 기구로 변화하게 되었다. 조선군의 병력은 초기부터 병역을 지는 사람들이 돌아가며 번을 서는 형태로 정착되었으나 양반들의 병역 기피가 극심하였고 이에 영향을 받아 양인들도 혹은 평민들도 군포를 대신 납부하고 병역을 대신하는 풍채가 일어나면서 조선 후기 이후 실제 병역에 복무하는 사람들은 가난한 양민이나 천인들이 많아 속오군은 천예군이라고 천대받을 지경이 되어 갔다. 이는 조선 말 여러 위기에서 제대로 된 군사적 대응을 할 수 없게 된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조선은 지배층이던 양반은 지역에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굳게 지킴으로써 토지를 소유한 지주로서 농업을 우선하는 경제 정책을 펼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의 경제는 화폐보다 현물에 의존하게 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고 상당수의 교환이 상호간의 호의에 의해 선물을 주고받게 되는 호혜경제의 모습을 보이는 중에 국가의 조세 수취와 분배, 상품의 교환 등이 혼재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조선 전기와 중기의 상업은 금난전권이 주어진 독점적으로 상인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고 훨씬 자유로운 상업활동은 금난전권이 폐지된 신해통공 이후에 이루어져 갔다.
화폐의 원활한 보급은 조선 후기 일본으로부터 엄청난 구리를 수입한 뒤에야 가능해지게 되었다. 후기에 들어서면서 민간이 운영하는 수공업이 발달하여 오늘날에도 지역 명산물로 꼽히는 한산모시나 전주시의 부채 등과 같은 상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인 상업망이 크게 발전하게 되면서 이익을 목적으로한 상업 활동이 훨씬 활발해졌고 조선 후기에 등장한 오일장과 같은 정규 시장은 오늘날에도 전통 시장의 형태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의 주요 이동 혹은 운송 수단은 강과 바다를 이용한 수로의 운반이었는데, 주요 교통 요에 조창이라는 것을 세워 세곡을 보관하였으며 조운선을 통하여 한양까지 운반하게 되었다. 육지의 교통로는 역참이라는 기관을 두어 국가의 주요 연락망으로 삼아왔고 전국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9~10개의 큰 도로를 운영하게 되었다. 조선의 공식적인 신분제도는 크게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를 두었는데 실제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 등으로 세분화로 나뉘게 된다.
조선의 문화는 여러 이웃 문화의 수용과 독창적인 발전이 교차되며 형성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전통 문화로 손꼽히는 한옥, 한복, 한식 등은 대부분 조선 후기에 완성된 문화를 기반으로 하게 되었다.
조선은 오백여년 동안 이어진 국가로 세계의 역사는 근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조선 역시 이 기간 동안 안팎의 변화를 겪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각 부분에서 시기별로 서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 시기를 전기와 후기 혹은 초기, 중기, 후기로 구분하게 되었다. 이 때에 구분은 아직 학계 전반에서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대략적으로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과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15세기~16세기 초반에까지를 초기로 보고, 사림의 등장과 붕당 정치가 형성된 16세기 중반~17세기를 중기로, 18세기 초~19세기의 시점을 후기로 나누고 있다.
-국호
원나라의 세력 양화와 명나라의 건국으로 국제적인 정세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에 우리나라는 고려왕조 말엽으로 국내에서는 새롭게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가 성리학에 입각한 국가 운영을 주장하게 되었다. 신진사대부는 정몽주와 같이 고려의 개혁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 이상을 실현하려는 온건파와 정도전과 같이 역성혁명을 불사하고자 하는 급진파가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요동반도에 진출하는 일에 대해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놓고 갈등을 빚었고 요동의 정벌을 위해 출진하였던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통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권력을 잡은 신진사대부 급진파는 처음에는 국왕을 교체하고 고려의 국체를 유지하였으나, 결국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가 국왕으로 즉위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처음에는 국호를 변경하지 않고 계속 고려로 하려 하였으나, 나중에 고려라는 이름을 버리고, 명과의 관계 속에서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게 되었다. 국호의 결정은 고조선을 근거로 한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에서 유래한 화령을 후보로 세우고 명나라에서 결정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국호가 조선으로 결정된 것은 기자조선의 사례를 들어 조선을 중국의 번국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명나라와 단군조선 이래의 독자성을 의식한 신진사대부의 의지가 절충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 국왕은 대외적으로 중국의 책봉을 받는 형태로 재위하였으나 실제로는 독립적인 세습에 의해 계승되었으며, 조선의 국가 제도 역시 독자적인 국풍을 유지하게 되었다.
건국 초기 조선은 대내외적으로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어 갔다. 외교적으로는 명나라의 홍무제가 조선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고 내부에서는 왕자의 난과 같은 분열과 두문불출과 같은 일부 사대부의 새 왕조에 대한 반감을 다독여야 하였다. 조선은 외교에서는 명과의 사대를 강화하고 내부에서는 왕권의 확립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명나라에 대해서는 영락제의 즉위 이후 사대 외교 관계가 수립되어 대외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민본 사상과 천명을 앞세워 새왕조 건국의 정당성을 강화하게 되었다.
조선의 국서와 외교문서는 국명을 조선국으로 표기하게 되었으며 조선국이라는 명칭은 1876년 부산항 조계 조약 체결 이후 사용되었으며, 이씨 조선, 또는 이조라는 표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조선사 정리 사업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한국은 해방 이후에도 이 용어를 별다른 비판 없이 사용하다가 1970년대 후반에 들어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의 군사, 병력 (0) | 2024.11.03 |
---|---|
조선 후기, 전반적인 정치 (0) | 2024.10.31 |
대한민국의 임시정부, 이후 혼란기 (0) | 2024.10.30 |
대한제국의 시작 (0) | 2024.10.30 |
조선, 제국주의 외세의 침입 (0) | 2024.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