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종이 1897년에 수립한 대한제국이 무너지면서 주권이 상실하다가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여 각도 의정원이 모여 임시헌장 10개조 채택하면서 황제국가인 대한제국이었다가 4월 13일 국민국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바뀌게 되었다. 임시정부의 구성원은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국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시정부 초기에는 대통령제를 채택하였으나 국무원제를 운영하게 되면서 이후에 의원내각제가 정부형태로 변형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대 이후에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만주에서는 한국 독립군들이 일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모두가 알게 된 대표적인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가 탄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간도참변을 일으키면서 많은 한국인을 학살하게 되었다. 1920년 12월 8일 임시정부의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이승만이 대통령 취임을 위해 상하이로 들어오게 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의 독단적인 구미 위원부 설치 건과 국제연맹 위임 통치 건에 반대하게 되었는데, 러시아 연해주 거류 동포사회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가 임시정부에 통합되면서 그들의 대표로 국무총리가 된 이동휘는 미국교포의 독립자금을 축내며 외교운동으로 신탁통치를 주장하는 이승만이 대통령을 맡는 것에 대하여 반대한다며 국무총리직을 사임하는 일이 생겼고 이승만에 반대하는 신채호 등이 이탈하게 되면서 임시정부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안창호는 코민테른 자금을 임시정부에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만드는데 이 자금을 사용하여 이승만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다시 미국으로 떠나버렸고 반임시정부적인 군사통일 촉성회의 국민대표회의 개최 주장이 호응을 얻게 되자 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계획을 세웠으며, 이를 위하여 안창호, 김규식이 내각에서 사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승만이 임시의정원을 통해 대통령직에서 탄핵되고, 바로 이어 취임한 박은식은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고친 뒤에 사임하였으며, 초대 국무령 이상룡이 서간도에서 상하이로 왔지만 내각 조직에 실패하여 다시 서간도로 돌아가는 일이 생겼다. 그 뒤, 양기탁을 1925년 2월 국무령에 천거하였으나 바로 사퇴하였고 5월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천거하였으나 사양하여 의정원장 이동녕이 국무령을 맡게 되어졌다. 홍진이 제3대 국무령으로 뽑혀 진강으로부터 상하이에 와서 취임하게 되었으나 역시 내각 조직에 실패하게 되었다. 비로소 김구는 국내, 만주와 연락이 되지 않자 미주 동포들에게 편지를 써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에 이르렀다. 시카고의 김경이 이끄는 공동회, 하와이의 안창호를 비롯한 여럿이 이주에서는 국민회를 중심으로 김호 등 멕시코의 김기창과 이종오 그리고 쿠바의 임천택 등 동지회의 이승만을 비롯한 여럿이 모금에 참여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주 동포들의 호응을 받으며 1931년 김구는 보다 직접적인 항일 투쟁을 추진하기 위해 특무 조직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1932년 1월 8일 김구는 이봉창을 시켜 당시 일왕이었던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암살에는 실패하였다. 다만 이 소식으로 인해 내국에서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또한 이덕주와 유진식을 국내로 파견하여 조선총독 암살을 지시하게 되었으며, 유상근과 최흥식을 만주로 파견하여 관동군 사령관, 관동청 총재 등의 암살을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어서 상하이사변이 터지고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승전기념과 천장절 행사가 열리자 윤봉길로 하여금 폭탄을 던지게 하여 시라카와 요시노리를 비롯한 일본군 고관들을 암살하는 중대한 임무를 주게 되면서 이 일로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수배된 김구는 상하이를 떠나서 숨어 지내야만 했으나 남경으로 옮긴 중화민국 정부는 이를 계기로 김구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었다 피신한 김구는 1933년 중화민국의 장제스를 만나 항일 전선 협력에 합의하게 되면서 급물살을 타는 듯했으나 중일 전쟁의 발발로 임시정부는 항주와 진강, 장사, 광주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된다. 충칭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게 되었고, 1941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연합군에 가담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일본에 선전포고하지만 한국광복군이 미처 국내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에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되었다.
-군정기
광복 이후에 정치적으로 혼란과 무질서 속에 있던 한반도는 얄타 회담 당시 이루어진 비공식적 합의 따라 소련과 미국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면서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영향 하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남쪽에는 미국의 원조 아래 대한민국이 국가적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한반도에서는 좌우익 세력 간 수많은 정치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상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사실상 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지원한다는 명목하에 대한민국의 자주적인 결정보다는 미소공동위원회의 설치, 강대국에 의한 잠정적인 신탁 통치에 원하지 않는 합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신탁 통치는 국내에서 동아일보 3상 결정 왜곡 보도로 촉발되어 좌우간 갈등이 심화되면서 우익들은 3상 결정을 신탁통치결정으로 보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으로 전개하여 남조선 대한 국민 대표 민주 의원을 결성하게 되었다. 이에 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은 반탁 운동을 반소, 반공 운동으로 확대하게 되었고 반면에 좌익들은 3상 결정을 임시정부 수립으로 보고 처음에는 반탁운동을 하였으나 후에 3상 결정문 전문을 입수한 뒤에는 민주주의 민족 전선을 결성하고 모스크바 3상 회의 총체적 지지 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 중도파계열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고, 미군정도 자기 기반 강화를 위해 중도파를 중심으로 정계 개편을 시도하려는 목적으로 이를 지원하였는데 그에 따라 좌우 합작 위원회가 결성되며 좌우 합작 7원칙에 합의하게 되었다. 김구 계열은 이를 지지하였고, 이승만 계열도 조건부이긴 하나 찬성하였지만, 김성수와 한민당 계열과 남로당파에서 불참하고, 여운형의 사망으로 구심점이 상실하면서 이승만, 김구 등이 이탈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 결국 1947년 12월에 해체되게 되었다. 1947년에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지만, 역시 협상의 진전은 전혀없이 양측의 입장만 확인한 채 완전 결렬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결국 이 문제는 해결이 되지 못하고 미국은 한반도의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는 안타까운 일이 되었다. 그 시기에 김규식와 김구가 주도하여 남북협상을 개최하고자 하였으나 이 역시 많은 문제들로 반대로 인해 진전이 없이 좌절되고 말았다. 유엔에서 제안한 남북한 총선거 실시가 북측에 의해 거부되자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을 치르게 되면서 김구 등 일부 민족주의 인사들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반대하여 선거 불참을 선언하였고, 제주도에서는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4.3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주도 진압 명령을 받은 여수주둔의 국방군에서는 진압명령을 거부한 여순사건이 벌어지고 하였으며, 혼란한 가운데 치러진 선거를 통해서 제헌국회와 대통령이 선출하게 되었으며, 유엔에서는 대한민국을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북측에서는 공산주의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한 뒤에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지금 북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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