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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조선 중기 경제 체제의 해이 변화

by wanibini 202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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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누각

 

양반 벼슬아치들은 국가로부터 우선 과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신 전, 별 사전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들은 결국 모두 세습되어 갔다. 게다가 양반 관리들은 또 겸병 개간 등의 각종 방법으로 그들의 소유지를 확대시켰다. 특히 비옥한 삼남 지방의 넓은 공전을 침식하여 갔다. 직접 접조차 폐지되자 그들의 토지에 대한 욕구는 농장의 확대를 가져왔고, 토지를 잃고 유망한 농민의 증가는 점차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다. 양반 관리들의 사치를 위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공람이나 진상 또한 농민들의 커다란 고통이었다. 더구나 이런 농민들의 고통을 이용한 방납까지 생겨 그 피해는 극심해졌다. 이런 폐단을 개혁하기 위하여 이이는 수미법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았다. 환곡 제도에 의하여 정부는 농민을 상대로 한 일종의 고리대를 하기도 했다. 환곡은 원래 의창이 담당하는 일이었으나 의창이 제구실을 다 하지 못하자 상평창에서는 이를 맡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래 농민 진휼 정책에서 발단했던 환곡은 점차 변질되어 갔던 것이다.

특수직에 종사하는 직역 외에 양인에게 부과되는 신역은 주로 군역이었다. 그런데 이 군역 또한 신역의 포납화 경향을 촉진하여 그 제도를 해체하였다. 초기에 있어서 군역의 대가로 바치는 포는 상당히 고가에 해당하는 것이었고 수포 대역의 제가 관행이 되면서 조납은 정남에 대한 인두세와 같이 되었으며, 평가절하되어 갔다. 그 공정액은 당시 전세의 약 3배에 해당하는 것으로 양인들에게는 극히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원래의 신역은 무너져 가고 이의 결과로 농민들의 생활은 불안정했으며 많은 농민이 유민이 되어가면서 농촌은 황폐해져 갔다. 그에 따라 각지에서 도적의 무리가 생겨나고 그중에는 임꺽정과 같은 무리도 생겨났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제도의 결함이 드러나게 되고, 특히 지배계급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제도의 문란에 따른 운구 재상의 대토지 소유는 조지 분배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신진 사류의 불만을 사게 되어, 여러 번에 걸쳐 사화라는 참극을 빚어냈다.

처음에는 신진 사류들이 빈번히 화를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지방에 내려가 학문에만 열중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선조 때에는 이들을 등용하기 위해 시작하여 마침내 사 류들이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이번에는 사 류들 사이에 다시 대립이 생겨 자기 일파만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대대로 싸우게 되어, 이를 당쟁이라 한다. 처음에는 지방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 나중에는 모두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이방 세력의 중심을 이루고 끈덕진 당쟁의 기반이기도 하여 심한 폐단을 나타냈다.

중종은 1506년 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래서 중종 초반의 왕권이 미약하였고 중종은 왕권 강화보다는 왕권의 안정을 이루는 데 주력하였다. 그 방책으로 조광조 등 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철저한 유교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입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 차츰 그를 멀리하게 되었다.

특히 조광조의 반정 공신 명부에 올라온 공심들이 진짜 공을 세웠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다수의 공신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결국 중종은 1519년 남곤과 심정, 홍경주와 계획해서 조광조를 비롯해 다수의 사림을 실각시켰고, 조광조와 사림파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를 기묘사화라 칭한다. 그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조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45년, 명종이 조선 13대 왕으로 등극하자 어머니 문정왕후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옥좌를 파평 윤씨 일가의 당쟁이 극에 달하였는데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과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이 세자와 경원대군을 내세웠다. 하지만 인종이 보위에 오른 지 1년 채 안 되어 승하한 후에 명종이 보위에 오른 후 대윤을 몰아내는 사건이 을사사화가 일어나 대윤 세력을 모두 숙청하고 그에 연루된 인명 피해를 보았다.

그 후부터 윤원형의 세력이 조정 내에서 활개를 쳤고 문정왕후의 극단 정치가 시작됐다. 문정왕후는 당시 수많은 인명을 사사함으로써 큰 질책을 느꼈고 문정왕후로서는 종교를 신앙하게 되었고 유교숭배 배불을 중심으로 한 유교 사회인 조선 최초로 불교의 승려인 보우를 판선교 양종사도 대선사라는 정 2품 직책에 앉혀 불교 중흥에 힘썼고 도첩제를 실행해 승려를 뽑게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이때 문정왕후는 수많은 질책과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 섭정 시대는 1553년에 종결을 내렸으나 이미 정세는 문정왕후의 세력에 기울어 있었고, 문정왕후의 정치간섭이 이루어져 명종은 문정왕후가 죽기까지 자기 의사대로 친정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비가 죽어 주변에는 모두 소윤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종은 신하 앞에서도 임금의 권한을 실행할 수 없었다. 약 12년간 이런 행위가 이루어졌으며 문정왕후도 쇠약해지고 있었다.

1565년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정치는 안정을 되찾았고, 윤원형과 정경부인 정난정의 관직과 직위를 삭탈함으로써, 명종은 왕권을 펼칠 기회가 왔으나 기울던 조정은 이미 부패한 상태였다. 명종 자신도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은 지 2년 만에 생을 달리하였다. 이 시기로 인해 조선의 정치 구도가 흐트러진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전적으로 사림들의 시각에서 비친 관점이므로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을 완전히 수용하기는 어렵다.

1567년 왕위에 오른 선조는 이황, 이이 등 사림을 대거 중용하였다. 선조는 사림을 통해 자신의 취약한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한 기묘사화 때 당쟁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조광조를 비롯한 수많은 유학자를 복권했으며, 훈구 세력 대신인 남곤, 윤원형 등을 대역죄로 단죄하여 관작을 추탕하고 상훈 하여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후에 사림이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인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서인으로 분리되어 붕당이 형성되자, 선조는 어느 한쪽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이에 정국이 단번에 교체되는 일 잦았다. 거듭되는 사화 속에서도 사림들은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발전하여 갔으며, 드디어 선조 때에는 재차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들 속에서 또다시 당쟁이 일어나게 되어 정쟁은 항상 되풀이되었다. 당쟁의 시작은 심의겸과 김효원 양당의 파로 전랑 직을 에워싼 암투에서 비롯되었다. 양파의 대립 과정에서 동인과 서인이 생겼으니 일찍이 이준경이 붕당의 징후가 보인다고 한 예언이 적중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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