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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조선 전기, 개국과 왕자의 난

by wanibini 2024.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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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궁의 대표적인 건축

 

위화도 회군에서 정권과 군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도 장악하던 중 1392년에는 이성계의 5남인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고 그해 음력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에서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

1393년 음력 2월 15일에는 나라의 이름을 고려에서 조선으로 고치고 1394년 음력 1월에는 당시 남경이라 불리던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었다. 또한 고려의 법제를 개혁하여 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태조는 고려 때에 큰 폐단이 되었던 불교 대신에 유교를 존중하여 이를 교육의 근본이념으로 삼으니, 불교는 점점 쇠퇴하여 천대받고, 유교는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한편 명에 대해서는 사대 정책을 써서 국호를 고칠 때에도 명나라의 승인을 받았던 일이 있다. 따라서 서로 사신의 내왕이 잦았으며, 이를 통하여 회사 형식의 국가 간의 무역이 행하여졌는데, 이 두 정책은 조선의 근본정책으로서 계속 계승되었다.

14세기말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 고려는, 안으로는 기존의 귀족 세력인 권문세족과 그에 반발하는 신진 사대부들이 대립하여 정치가 혼란하였고,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과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이어지는 원명 교체기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고려의 북방에서 이성계는 이민족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명성을 얻어 중앙 정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즈음 고려 조정은 철령위 문제로 밖으로는 명나라와 안으로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에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에게 회군을 청했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음력 5월 20일 군사를 수도로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 한다. 이성계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최영 세력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위한 뒤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동시에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들과 손잡고 과전법과 같은 전제 개혁 등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창왕을 다시 폐하고 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소위 폐가입진으로,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므로 폐하고, 진짜 고려 왕 씨를 왕으로 삼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사전 개혁을 단행하고 과전을 공포하였다. 전제 개혁으로 인하여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은 막대한 과전을 받게 되었으나 권문세족들은 농장을 몰수당함으로써 경제적 토대가 붕괴하였다. 한편 공전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켜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게 했다.

태조는 8번째이자 막내 왕자인 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삼았으나 개국 당시 공이 컸던 다섯 번째 왕자 정안대군 이방원은 이에 불만을 품고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방원은 1398년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켜 왕세자 이방석과 일곱 번째 왕자 무안대군 이방법, 그리고 왕세자를 지지했던 정도전과 그이 일파를 살해했다. 그리고 당시 생존해 있던 태조의 아들 중 가장 위인 두 번째 왕자 영안대군 이방과에게 왕세자 자리를 양보하여 그해 음력 9월 태조는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었고, 이방과는 정종이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야심을 품고 있던 또 다른 왕자 회안대군 이방간은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웠으나 큰 보상을 받지 못해 불만을 품은 박포와 공모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잡은 이방원의 군사와 개경에서 맞붙어 패했으므로 이방간은 유배되고 박포는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종은 정안 대군 이방원을 왕세자로 삼고 음력 11월에 이방원이 등극하여 태종이 외었다.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왕권을 강화하고 왕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관료제도를 정비하였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했으며 양전 사업과 호구 조사를 통해, 조세 제도와 호적 제도를 개혁하였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하였고, 또한 왕실 외척과 공신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켜 정치를 안정시켰다. 또 언론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신하들을 견제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져진 안정을 기반으로 등극한 세종대왕은 군사 과학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였고 정치는 안정되어 갔다. 이 시기에는 주자학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하였으며, 고려 말에 들려온 면화가 보급되어 갔다. 또 국방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북방 지역인 4군과 6진을 개혁하여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화포 제작 및 조선 기술 발전 등을 통해 왜구의 약탈을 방지하였다. 또한 궁중 안에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을 진흥했다. 또한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와 금속활자를 개량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였다. 개량된 금속활자로 여러 가지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으며, 의서 편찬을 통해서 의료 관계 개선이 집약적으로 이루어졌다.

세종의 맏아들 문종이 2년이라는 짧은 치세 뒤에 서거하고 문종의 아들 단종이 뒤를 이었으나 어린 나이 보위에 오른 단종은 곧 병권을 장악한 세종의 둘째이자 숙부 되는 수양대군에게 뺴앗겼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이 채택한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조부 태종이 주창한 육조 직계제를 부활시켜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신하가 숙청당하고 많은 학자를 양성하였던 집현전을 폐지하였다. 세조는 태종처럼 신하의 권력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복원하고, 동국통감 등을 만들기도 하였다.

세조의 손자인 성종은 개국 이후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으며,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편찬 사업이었던 경국대전의 편찬을 완성하였다. 성종은 경국대전의 편찬을 반포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하였다. 또한 영남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 세력인 훈구파를 견제하였다. 이로써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확립되었다.

15세기말부터 지방의 사림 세력이 정계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해 시작했다. 연산군의 거듭된 실정에 견디지 못해 사림파를 중심으로 일어난 중종반정을 통해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는 명종 때 비로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이때부터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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