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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후삼국의 성립

by wanibini 2024.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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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의 성립
한국의 옛 궁

 

견훤과 궁예는 신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정원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라는 그 지배권이 축소되면서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대립하는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어 갔다.

 

- 신라에서 고려로 

태봉의 장군이었던 호족 출신이자 태조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후, 적극적으로 친 신라 정책을 펼쳐갔다. 그의 신라에 대한 우호 정책은 신라인들을 회유하는 데 유용했는데 실제로 태조는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고려군을 파견하여 신라군을 도와 후백제군에 같이 맞서 싸움으로써 신라인들의 신망을 얻어나갔다. 그 결과 마의 태자 등의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신라의 백성들을 더 이상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경순왕 9년 10월 935년에 신라를 고려에 귀순시키게 되었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태자보다도 더 극진하게 예우하며, 신라 수도 서라벌을 경주로 개칭하고, 신라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임과 동시에 경순왕의 사촌 여동생인 신성왕후와도 혼이하게 되었고 이후 고려 경주로 개칭하며, 이후 고려는 신라와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게 되었다. 삼국사기를 저술했던 고려의 김부식은 그때 만약 힘껏 싸우며 지키는 데 사력을 다했는다면, 반드시 그 종족을 멸망시키고 무고한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라고 논평하며, 경순왕의 귀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고려 태조는 천년 국가였던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기리기 위해 자신보다 먼저경순왕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 복사본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며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어진이 되었다. 고려왕의 어진이 조선 세종 때 불태워지거나 땅에 묻혀버린 것과 비교하면, 신라의 귀순을 결정했던 경순왕의 어진이 조선시대까지 보전된 것은 멸망 후에도 신라 왕실은 존중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신라의 귀순을 반대했던 마의태자는 통곡하며 경순왕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초식으로 연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막내아들은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 해인사에 드나들며 망국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이라 불렸다. 마의태자와 범공은 끝까지 신라에 충절을 지킨 인물로 평가되어진다.

 

고려 제8대 국왕인 현종은 신라 왕실의 외손이고, 이후 왕위를 계승한 이는 모두 현종의 자손이었으므로 고려 왕실의 정통성은 신라로부터 나왔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스스로 귀순함으로써 백성을 살렸고, 고려로부터 수도와 문화가 보존되며,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474년 동안 신라 왕실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 삼국시대의 문화

신라의 문화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중국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인 만큼 늦게 발전해 나갔다. 대신 신라 고유의 독자적인 문화가 발전해 갔다. 중국의 한자가 전래됨에 따라 사서가 편찬되었고 언어생활에서 이중성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중국어와 고대 한국어의 언어 구조가 판이하고 한자가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구어와 문어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었다.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이두 혹은 향찰이라는 표기법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유일한 사례이기도 했으며 조선시대 때 한글이 창제되기 전까지 한민족의 문자로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다. 

 

고분 출토 유물로는 금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금속 세공품과 유리 제품. 토기 등이 있는데, 신라의 금관은 그 양식이 시베리아의 샤먼의 관과 통하는 점을 지니고 있어, 불교 수용 이전 시기에 신라 문화의 성격의 일면을 전해 주고 있으며, 유리 제품은 유리의 질과 제품의 양식이 로마 지역과 페르시아 지역의 것과 연결되며, 토기 양식 중에도 그러한 요소가 보였다. 신라의 불교문화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아주 발달하게 되었는데 왕명이 불교식으로 바뀌었고, 법흥왕과 진성여왕 등이 모두 불교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호국불교라는 특징을 지녔다.

 

- 삼국 시대의 통치 제도

신라는 원래 육부 연맹에서, 출발 근처의 작은 부족연맹을 병합, 정복하여 국세가 점점 강해져서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한반도를 통일하게 되었다. 지방 관제도 그 국세의 확장에 따라서 확대, 발전되어 가면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왜국으로 승려의 통행만을 허락하게 되었다. 태종무열왕 때부터는 왕족의 혈연적 제약을 벗어나, 종래 성골의 신분만이 계승한 왕위는 이후 진골로 바뀌었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골품제는 진골을 제1급으로 하여 확립되어 갔다. 또 종래의 불교식 왕호 대신 중국식 칭호를 사용하여 왕권을 존업성을 높여갔다. 

 

모든 관료는 엄격한 신분 제약을 받아야 했으며, 율령정치가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족장 회의제의 정치 체제는 관료 정치의 성격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서 중앙 관료를 감찰하는 기관을 위시하여 여러 중앙 관서가 분화, 확충되어 갔다. 골품제와 더불어 신라의 17 관등의 관료 체제가 확립된 것도 실제로는 신라의 삼국을 통일한 시기의 일로 보아야 할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최고의 행정기관인 집사부가 진덕여왕 5년 651년에 설치되었고, 형률 사무를 관장하는 이방부의 규범 60여 조가 새로 정해지고, 감찰 기관인 사정부가 신설되었으며, 문무왕 때에는 주. 군에 외사정을 두어 지방 관리의 감찰을 담당케 하였다. 

 

이 외에도 조부, 예부, 선부, 위화부, 사록관, 병부, 창부, 승부, 예작부, 영객부 등을 설치했고, 동성의 수축이나 사찰을 영조할 때마다 소관의 관서가 세워지게 되었다. 왕권 강화의 추세에 따라 군현의 명칭과 관호가 전면적 중국식으로 개편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관료 체제의 지향은 진골 신분의 반발 때문에 혜공왕 때에는 다시 원래의 칭호로 환원되었고, 이후 진골 신분 간에는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야기되었는바 선덕왕, 원성왕은 모두 그러한 싸움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즉위하게 되었다. 신라는 영토 확장에 따라 신문왕 때 9주와 군현을 설치하여 갔고, 또 정치, 군사상의 요지에도 5 소경을 두었는데 종래 전략상의 의의가 컸던 주의 장관인 군주는 문무왕 때에는 총관으로 원성왕 때에는 도독으로 개칭되어 점차 지방 행정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다. 주 밑에는 군을 두고, 군 밑에 현을 두어, 장관을 각기 태수, 현령이라 칭했다. 지방 장관은 관계상으로 일정한 제한이 있었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을 일정한 제한 밑에서 신라의 관료 체제에 흡수되었다. 

 

군현 외에 신라에서 특수한 것으로 일종의 천민 집단인 향, 소, 부곡이 있었고, 지방의 호족은 지방 관서의 하급 관리로 임명하고, 이들을 검찰하고 번상, 시위케 하여 그들의 지방에서 발호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는 강력한 군사 조직이 필요하자 종래의 6정을 개편, 확충하고 중앙의 군단 조직인 9 서당과 지방의 군대 조직인 10정을 배치하여 복속민을 회유, 견제하게 하였다. 5 주서와 3 무당 등을 두어 군제를 보충 내지 확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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