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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고려, 무신정권의 성립 그리고 몽골과의 전쟁

by wanibini 2024.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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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정권의 성립 그리고 몽골과의 전쟁
궁의 내부

- 무신정변 과 무신정권

12세기에 들어 고려의 지배층 내부에서는 문벌 귀족과 측근 세력 간에 정치권력을 둘러싼 대립이 치열해지기 시작해 정치가 혼란스러워지게 되었다. 이런 때에 평소 문신들만 우대받는 것에 불만이 커진 무신들은 정중부, 이의방 등을 중심으로 1170년에 정변을 일으켜 다수의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하고 거제도로 귀양 보낸 후 허수아비 임금인 명종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무신정변이라고 한다. 또한 최충헌이 두각을 나타내기까지에는 무인의 군웅시대로써 정중부.이의방.이고.이의민. 경대승 사이에 세력 쟁탈과 알력이 심하였다. 명종3년 1173년에 동북면 병마사로 있던 김보당은 의종을 경주로 데려와 의종을 복위 시켜준다고 하여 정중부에게 김보당의 난을 일으켰으나 김보당은 정중부에게 바로 붙잡혔다. 무신정변 이후 무신들은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모두 독점하고 부를 늘려갔으며, 저바다 사병을 길러 서로 권력을 뺏고 빼앗기는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화되어갔고 백성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져 여기저기에서 여러 차례 봉기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최우에 의해 최씨 정권이 더욱 강화된 결과 정방,서방이 설치되고 최충헌이 조직한 도방은 더욱 확대되어갔다. 최우는 또한 교정도감을 의연히 존속시켜 권신의 막부로 삼았으며, 이에 따라 교정별감의 관직도 권위가 서게 되어 역대 권신의 필수직이 되어갔다.

 

이러한 지배 체제에 대한 반발적 운동이 무신 상호 간의 상극, 각 지방의 농민 및 노비의 반란이란 형태를 띠고 있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20여 년의 짧은 기간에 주마등같이 무인들의 군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등 고려 사회는 혼란 속에 휩싸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196년에 장군 최충헌과 그의 아우 최충헌과 그의 아우 최충수가 이의민을 살해하여 정권을 독점한 것은 무인 정치의 진전에 있어서의 한 획을 그은 것이기도 했다. 최충헌 일대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최씨 정권의 기초는 그의 아들 최우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어 무인 정권의 기구가 정비되기에 이르렀다. 

 

-노비와 농민의 난

사치와 유락은 국가 재정의 파탄을 가져왔던 의종 때는 농민 수탈의 강화를 가져왔고 실의에 빠진 비통한 농민들은 지배 체제의 문란과 무신들의 하극상 풍조에 자극되어, 신분 해방과 지배층의 압박과 수탈에 항거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대규모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12세기 초부터 집단적인 도적이 되어 전국 각지에 소란스럽게 일어나며 무신정변을 전후하여 전국 도처에 벌떼처럼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명종 2년 1172년 북계의 창주.성주.철주 등지에서 지방관의 횡포에 분격하여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 뒤 묘향산을 근거로 조위총의 남은 무리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반란을 계속하게 되었다. 남쪽의 반란은 명종 7년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가 난을 일으켜 크게 번져가게 되었는데 경상도에서는 손청과 이광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명종12년 1182년에는 전주에서 군인과 관노들이 관리의 가혹한 조선 독역에 반항하여 또한 난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초기의 반란은 대체로 자연 발생적인 것으로써, 지방관이나 향리들의 억압에 반항하여 농민이나 군인 혹은 노비들이 일으킨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부당한 억압과 압박의 제거와 신분 해방 등 실질적인 것이었으나 아직은 개별적인 요구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러나 후에 명종 23년 1193년 김사미,효심의 난에서부터 반란군은 연합 전선을 구성하게 되었고 일련의 지속적인 양상으로 명주의 농민 반란군은 동경의 반란군과 합세하고, 진주의 노비 반란군은 합주의 부곡 반란군과 연합하여 공동 전선을 펴게 되었다 또한 신라 부흥을 외치며 일어난 동경의 반란군은 운문.울진.초전 등 각지의 반란군과 연합하게 되었다. 경상도 일대에는 서로 밀접한 연락을 가진 반란군의 연합 전선이 이루어져서 10여년간 세력을 떨치면서 이 반란은 지방뿐만 아니라 개경에서도 일어나게 되었다. 신종1년 1198년에 일어난 만적의 난은, 신분 해방은 물론 더 나아가서 정권 탈취를 위해 계획된 것이었는데 이들 반란은 모두 최충헌이 진압하면서 이 반란군의 부르짖음은 그 이후 정부 시책에도 반영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고려의 신분 질서의 동요를 말하여 주는 이들 반란은 고대적인 유산을 청산하려는 사회적인 움직임으로써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몽골과의 전쟁

13세기 초 중국 대륙의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는데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 생활을 하던 몽골족이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면서 금나라를 공격하여 북중국을 점령하게 되었는데 이때 금나라의 예하에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골에 쫒겨 고려로 침입해 왔는데 고려는 이들을 반격하여 강동성에서 포위하면서 거란족을 추격해 온 몽골 및 두만간 유역에 있던 동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거란족을 토벌하게 되었고 이후 몽골은 자신들이 거란족을 몰아내 준 은인이라고 말하며 지나친 조공을 요구해 오기 시작했다.

 

마침 고려에 왔던 몽골 사신 일행 저고여가 귀국하던 길에 국경 지대에서 거란족에게 피살되자 이를 구실로 몽골군이 침입해 왔는데 이것이 고려-몽고 전쟁의 시작이 되었다. 힘겹게 의주를 점령한 몽골군은 귀주성에서 박서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길을 돌려 개경을 포위하였는데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몽골군도 큰 소득 없이 물어가게 되었다.

당시 집권자인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게 되었는데 이에 몽골군이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 전투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가 이끄는 민병과 승병에 의해 사살되자 퇴각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이후 고려는 7차에 걸친 몽골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내며, 약 30년간의 장기 항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는데 지배층들은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방어하겠다는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조판하고 강화도의 고려 조정은 수로를 통하여 조세를 걷어 들여 명맥을 유지하면서 장기간의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삶은 피폐해지게 되어갔다.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된 시기도 이 때이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점차 그 세력을 만회하기 시작한 문신들은 몽골와의 강화를 주장했으나 문신들은 외세를 이용하여 무인 세력을 견제하려고 한 것이었다. 몽골과 강화를 맺으려는 주화파는 일부 무신과 합세하여 최씨 정권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 김준.임연 등 무인들의 반대로 노골화하였으나 1270년 개경 환도와 더불어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고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으나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게 되었다. 이들은 장기 항전을 계획하고 진도로 옮겨 용장성을 쌓고 저항하였고,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진도가 함락되자 다시 제주도로 가서 김통정의 지휘 아래 계속 항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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