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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한국의 빼놓을 수 없는 역사, 신라

by wanibini 2024.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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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빼놓을 수 없는 역사, 신라
옛 궁

-신라의 대하여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935년까지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삼국 시대를 이끌고 발해와 함께 남북극 시대를 구성하였던 국가로,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된 왕국 중 하나였다. 진한에 소속된 성읍국가 중 하나인 경주 지역의 사로국이 그 시초이며, 혁거세 거서간이 나라를 세웠다고 알려져 있게 되었다. 왕이라는 왕호를 쓰기 전에는 군주를 방언으로 거서간, 마립간과 같이 간이라고 부른 기록이 있고, 이사금이라는 호칭 또한 잠시 사용되었다고 한다. 서기 503년 지증왕 4년 왕호를 확정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국호를 왕의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서 사방을 망라하였다.라는 의미의 신라로 확정하게 되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세워졌지만, 전성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6세기경 법흥왕 때 불교를 받아들여 왕권 강화와 백성의 단결을 도모하였으며, 금관가야를 병합하게 되었다. 진흥왕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6세기 중엽에는 한강 유역을 획득하여 중국 대륙과의 직교역로인 당항성을 확보하였으며, 화랑의 활약으로 대가야를 정복해 갔다. 7세기경 김춘추의 외교적 노력으로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게 되었다. 이후 676년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하여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옛 고구려, 백제 지역을 확보했는데 이로써 신라는 삼국통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으며, 698년 발해가 건국되며 북국인 발해와 함께 남국으로써 남북국 시대를 이루게 되었다.

 

9세기에 이르러 중앙 귀족이 분열하고 지방에서 자리 잡고 있던 호족의 세력이 성장하여,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태봉을 세우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게 되었는데 통일신라 중반부터 국력이 약해진 신라는 백성을 단합하려고 노력하게 되지만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편입하기로 귀순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56대 992년 사로국을 포함하여 이어진 신라의 종묘와 사직은 끝이 나게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는 9주 5 소경을 설치하고 9 서당 10정을 배치하여 고도의 중앙집권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고,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을 강화하여 왕권의 전제화가 실현되었고,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였는데 유학 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하게 되었다. 진골 귀족과 대결 세력이었던 6두품이 왕권과 결탁하여 산대적으로 부각되었고, 신라의 화랑도는 계승,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섬세하고 화려한 불교 유적과 유물들이 건축. 제작된 시기이기도 한데 8세기 성덕왕과 경덕왕 대에 이르러 극성기를 달성하게 되었다.

 

진한과 신라에서는 왕을 간이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는데, 통일신라시대에도 충지 잡간, 아간처럼 간이라는 호칭을 쓴 것을 잘 알 수 있게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성립에 대하여

고조선의 유이민인 진한 6부, 혹은 사로 6촌이 자신들을 다스려 줄 임금을 원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맞이하여 기원전 57년 혁거세 거서간 원년 4월 28일에 거서간으로 세웠다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의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고조선계통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신라는 처음 진한의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에서 출발했고 기원전 27년에는 성을 쌓게 하고 금성이라 불렸다. 동해안으로 들어온 또 다른 석탈해 라는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으로 추대되었으며,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79년에는 장군 거도 라는 이름을 가진 장군의 활약으로 각각 현재의 울산과 부산으로 비교되어 정해지는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을 공격하여 병합함으로써 경주가 외부의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4세기 말엽인 17대 내물 마립간 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발전을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김 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고, 이것으로 인해 왕권이 안정되고 다른 집단들에 대한 통치 집단의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고구려를 통해 전진에 사신을 보내 시대와 명칭이 바뀌어 예전과 다르다 고 전했는데 국력의 강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었다.

 

내물 마립간 때에는 해안가로 왜구의 침입의 자주 당하는 일이 빈번하였는데 특히 390년대에 여러 차례 왜에 침입을 받는 일이 더 많아졌다. 399년에는 특히 왜가 신라에 침입하자 이듬해인 400년 광개토대왕이 군사를 보내어 몰아내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고, 이 때문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했는데 그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등 이러한 동안에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또한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 북조의 문화를 도입하면서 차차 발전하는 계기가 되어갔다.

 

-신라의 정치적 발전의 이야기

내물 마립간 이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 되었으나, 5세기 초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5세기말 신라는 6촌을 6부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면서 발전하게 되었다. 지증왕 때에 이르러서는 정치 제도가 더욱 정비되어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군주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치게 되었다. 수도와 지방의 행정 구역을 정리하고, 대외적으로는 우산국을 휘하로 두게 되면서 지방 세력과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권까지 확립하게 되었다.

 

후에 법흥왕은 병부를 설치하여 군제를 개혁하고, 율령 반포, 공복 제정 등을 통하여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고, 골품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주변 세력들을 포섭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이 또한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532년 낙동강 하류 지역에 진출하고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신라는 중앙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하게 되었다. 백제와는 연맹 관계를 맺어 백제를 통하여 양나라와 교역하기 시작하였고, 이 시기에 남조의 문화까지 받아들이면서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면서 진흥왕 때에 그 전통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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