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학교 교육
국자감
국자감은 고려의 대표적인 관학이자 당시 최고학부였다. 국자감의 설립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여기는 데 첫 번째는 유교 군주의 지상과제인 교화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고 교화란 국민들을 유교적 이념에 따라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으로써, 유교사회에서 학교는 교화의 근원으로 여겨짐에 따라 유교 국가에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것은 당위였었다. 다음으로는 학교가 과거 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당시 왕들의 생각 때문이었는데 과거 제도는 유능한 인재선발을 위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왕권 안정을 위한 장치로 인식되었는데 만일 학교가 없었다면 학생들은 공부할 기회 자체가 없게 되어 과거 제도에 대해 무관심하게 될 것이고 이렇게 되면 과거 제도는 유지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고려의 왕들은 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국자감의 특징으로서는 먼저 묘학제가 있는데 국자감에는 공자를 위시한 유교 성현들을 제사 지내기 위한 장소인 문묘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한 학당이 별도로 있었는데 이는 문묘가 독립되어 있지 않아 학당 안에 부수적으로 설립되어 있었던 통일신라의 국학과는 다른 부분이었고 이러한 문묘 종사와 학술기관의 융합 기능은 조선의 성균관으로도 이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국자감은 6학 4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6개의 학교와 4등급의 입학자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이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국자학 : 문무관 3품 이상의 자손
- 태학 :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
- 사문학 : 문무관 7품 이상의 자손
- 율학. 서학. 신학 : 문무관 8품 이하 아들과 서인
위와 같이 국자감은 계급으로 나뉘어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는 많이 다른 교육 양상을 보였다.
국자학, 태학, 사문학, 율학, 서학, 산학의 6개 학교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각 학교의 입학자격도 4단계로 위계화되어 있어 국자감의 정원은 300인이었지만 율학, 서학, 산학의 입학 정원은 일정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수업 연한은 유교 경전을 가르쳤던 국자학, 태학, 사문학은 9년, 기술교육을 담당했던 율학, 서학, 산학은 6년이었다고 한다.
국자감의 교육과정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에서는 논어와 효경을 선수과목으로 이수하게 하였으며, 경서들을 3개 영역으로 나누고 각 영역에서 1개의 경전씩 학습하도록 하였다. 그 3개 영역은 아래와 같았다.
- 상서, 공양전, 곡량전 각 경전 별로 2년 6개월에 걸쳐 이수
- 주역, 모시, 주례, 의례 각 경전 별로 2년에 걸쳐 이수
- 예기, 좌전 각 경전 별로 3년에 걸쳐 이수
국자감에서는 경전의 학습과 함께 정치적 식견을 진술하는 시무책을 익히게 하였으며, 여가가 있을 경우에는 글씨를 연습시키되 하루에 한 장씩 쓰게 하였고, 국어, 설문, 자림, 삼창, 이아 등의 서적을 읽게 하였다고 한다. 기능교육분야의 경우엔 율학은 법령, 서학은 팔서, 산학은 산술을 교육하였던 것이다.
국자감의 교원은 박사와 조교로, 각 직급은 국자박사가 정 7품, 태학박사가 종 7품, 사문박사가 정 8품, 율학박사가 정 8품, 서학 및 산학박사가 종 9품으로 대체로 낮은 편이었다. 조교의 직급은 분명하지 아니하며 다만 기록에 율학조교가 종 9품으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고려의 국자감은 대체로 당의 국자감은 대체로 당의 국자감과 유사하였는데 차이점이었다고 한다면 학생 인원 측면이 있을 것이나, 이는 당시 인구 차이를 감안한다면 당연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입학자격을 비교해 보면 특히 두 나라의 사문학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당의 사문학은 서민들에게까지 개방되었던 것에 비해 고려는 문무관 7품 이상의 지위를 가진 자의 후손에 한하여 입학을 허락하기도 했는데 이는 고려 국자감이 당의 국자감에 비해서 폐쇄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려의 국자감 조직은 예종 4년 1109년에 국학에 7 재가 설치되면서 변화하게 되었는데 재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반과 같은 것으로써, 7재는 7개의 전공반을 의미하는 것을 말한다.
여택재 - 주역전공
대빙재 - 상서전공
경덕재 - 모시전공
구인재 - 주례전공
복응재 - 대례 혹은 예기 전공
양정재 - 춘추전공
강예재 - 무술 전공
예종 14년 1119년에는 장학재단인 양현고가 설치되었는데 충렬왕 때에 이르러 양현고의 재원이 고갈되자 안향이 관료들로부터 기금을 모금하여 섬학전을 양현고에 설립하게 되었다. 섬학전은 양현고의 재원이 고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부를 해주고 받는 금리수입으로써 학생의 후생경비를 확보하게 되었다.
여택재에서 양정재까지는 유학 전공반이었고, 강예재는 무술 전공반이었다. 이전의 기술학부가 없어지고, 무예학부가 생긴 것이었다. 강예재와 같은 무술 전공 과정을 국가의 최고학부에 설치한 것은 한국 역사 상 고려의 국자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조선의 성균관이 오로지 유학부만이 존재했던 것과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국자감의 강화는 왕권 강화와도 맞물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국격의 상징이기도 하였고, 고려의 여러 왕들은 국정 쇄신을 위한 노력 중에서 국자감의 정비를 중요한 과제로 생각하게 되었다.
고려의 교육제도는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무력적 통치에서가 아니라 문치주의에 입각한 유교정치이념을 표방하면서 호족과 백성을 회유, 통제하려 하면서 시작. 본격화되기 시작했으며 고려시대의 교육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고려의 교육제도는 유교정치의 일환으로 중앙집권화 과정에서 확립되었던 것이다. 특히 과거제도의 발달로 교육의 기능은 그 준비기관으로서 역할을 다였으며, 불교의 발달에 따라 사원 역시 민간교육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는 관학과 사학으로 나뉜 것으로 볼 때, 고려의 교육제도는 관학이 위주였으며, 특히 국자감이 교육기관의 최고장소였기도 했다. 여기는 잡학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입학자격이 계급별로 달랐으므로 귀족위주의 계급교육이었기도 했다. 교육재단, 교육시설 등이 구비되었는데 예종 충렬왕 때에 각각 커다란 혁신과 발전이 있었다.
세 번째로는 고려말에 이르러 주자학의 도입으로 본격화된 교육제도는 관리양성소의 기능은 물론, 전문 교육기관이라는 학문 연구소로서의 기능을 다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여말의 성균관은 조선의 성균관으로 발전되어 전근대교육의 중추적 기관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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