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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통일 신라의 모든 것

by wanibini 2024.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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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의 모든 것
옛 궁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 16년 676년에 한반도에서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하고 당나라를 격퇴한 일을 신라의 삼국통일이라고 말한다.

고구려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신라에서는 김춘추가 김유신과 연합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집권 체제를 강화하게 되었다. 이어서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여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의 반격을 우려하여 백제가 침공해 오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진덕여왕 2년 648년에 신라와 당나라는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할 것을 서로 합의하였고 군사동맹을 맺게 되었다.

 

신라는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나. 당 동맹을 맺었고, 지배층의 문란으로 국력이 소퇴하고 있었던 백제는 무열왕 7년 660년에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명말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는 잦은 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심하였는데, 연개소문의 아들들의 갈등으로 인해 국론이 분열되어 가고 있었다. 고구려는 결국 당나라의 공격으로 문무왕 8년 668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당나라는 신라와 협력한 후 합세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를 이용해 한반도를 장악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나라의 야심에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 일부와 연합하여 당나라와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고구려 부흥운동 세력을 신라는 후원하였는데, 백제 땅에서는 지배권을 장악해 갔다. 문무왕 15년 675년에 신라는 당나라의 20만 대군을 매소성에서 격파하여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문무왕 16년 676년 11월에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당나라의 수군에게 대승을 거두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게 되었다. 이의 신라는 삼국통일 달성하게 되고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까지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한반도에 있던 가야, 백제, 고구려 등의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한 신라는 문무왕 16년 676년에 나당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면서 당군을 대동강 북쪽으로 축출하며 삼국을 완전히 통일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문무왕은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지원하면서 신라군은 당군에 여러 차례 승리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당나라의 만주 지배권이 약화되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만주에서 발해를 건국하는 데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만주의 고구려 옛 북부 영토는 신라가 차지하지 못하였는데 30여 년의 공백기 이후 이곳에는 발해가 건국되었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르는데 이에 한민족 최초의 통일 국가는 신라가 아니라 고려이며, 신라의 삼국통일 대신 신라의 원삼국 해체기 등으로 고려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분분하다. 그러나 고려도 고구려 북부나 발해 영토와 인구는 통일신라와 마찬가지로 통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북부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는 불완전 통합이며 고려는 완전한 통합이라고 명확하게 달리 볼 수는 없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외세를 끌여들였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에 기반한 민족사학자를 중심으로 비판을 받아왔지만 한반도 내에서 민족의 정체성은 고려 이후에 완성되었다. 한반도 내에서 민족 국가의 정체성은 고려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생긴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말하기도 한다.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비판은 학계 주류로는 인정되지는 않는다.

 

-통일신라의 눈부신 발전, 왕권의 강화와 제도의 정비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많이 늘어났는데 오랜 전쟁이 끝나고 대외 관계가 안정되어 생산력이 증대하게 되었다. 이 즈음에 신라는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데 태종무열왕 이후에 왕권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으로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큰 성과를 올려 자연스럽게 왕권을 강화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무열왕의 직계 자손만이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8세기 후반 신라는 부가 크게 축적되면서 중앙 귀족들 간의 권력 투쟁이 치열해지면서,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군사력과 경제력, 새로운 사상을 갖춘 호족 세력이 성장해 나갔다. 진골 귀족들은 녹읍제를 다시 부활시키는 등 경제 기반을 확대하여 사병을 거느리고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신라의 중흥을 이끌었던 혜공왕이 죽고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진골 귀족들 사이에는 힘만 있으면 누구나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나갔다. 이런 이유로 경제력과 군사력을 확보한 귀족들은 왕위 쟁탈전을 벌이며,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운영되었으며, 시중보다 상대등의 권력이 더 커지게 되어갔다.

 

일련의 과정들로 녹읍을 토대로 한 귀족들의 지배가 유지되는 효과와 대토지 소유가 확대되었고, 농민들의 부담은 가중되어 갔다. 한편 자연재해가 잇따르고 왕족과 귀족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백성들에 대한 강압적인 수취가 뒤따르며 살기가 어려워진 백성들은 토지를 잃고 노비가 되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런 이유로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잦아지는 일들이 일어났다. 

 

9세기 중엽의 문성왕 이후 중앙 귀족은 지방 세력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왕위 쟁탈을 위요한 정쟁을 식히고 점차 타협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골품제로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었던 지방 세력은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공적인 조공의 형식으로 행해지던 대외무역은 점차 민간무역에서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활발히 교역했으나 당과의 무역이 가장 성하여서, 신라인의 왕래가 빈번한 산둥반도나 장쑤성 같은 곳에는 신라방이 생기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라는 행정기관이 설치됐다. 또 거기에는 신라원이라는 사원이 세워졌는데, 장보고가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은 가장 유명한 것이기도 하다. 민간 무역은 지방 세력가들의 의해 왕왕 일어났는데 당나라 조정의 지방 통제권이 약화되면서 해적의 출몰이 자주 일어났다. 자주 일어나는 해상무역에 큰 타격이 되었는데도, 이러한 배경 속에 해상의 군진이 설치되었는데 신라는 본래 변경의 수비를 위하여 육지에 설치하던 군진을 해적들의 활동이 심한 해안의 요지에 설치하였는데 적의 침입이나 피해를 막기 위하여 미리 지키고 대비하였다. 선덕왕 3년 782년 패강진, 흥덕왕 3년 828년 청해진, 흥덕왕 4년 829년 당성진, 문성왕 6년 844년 혈구진 등이 그것이었다.

 

흥덕왕 3년 828년에 장보고 설치한 청해진이 그중에 가장 대표적이었고 장보고는 해적 출몰의 방비는 물론 국제 무역을 하여 황해의 왕자가 되었으며, 다시 중앙의 정치에도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장보고의 경우와 유사하게 지방에서 일정한 지역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대를 이어가면서 행사하는 세력가들이 이 시기에는 수도 없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보통 성을 쌓고 스스로를 성주라고 칭하였다. 9세기 이후에 나타난 신라 사회의 이러한 커다란 변화는 상업 발달에 따른 대상인의 대두와 대토지 소유의 확대로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중앙집권 체제의 약화에 따라 지방의 토호와 귀족들은 점탈 또는 매매의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결과적으로 대지주로 성장해 나갔다. 또한 신라 지방 행정의 말단인 촌락의 인민을 통제하던 촌주도 역시 토지와 인민을 다스리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약화된 국가 권력은 이들 지방 세력을 규제할 수 없었으며, 국가의 비호 아래 발달한 사원도 세금을 면하는 특권을 가지고 토지를 겸병하며 농장을 확대해 나갔다. 한편, 대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을 필두로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6두품 출신의 유학생들과 선종 승려들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치 이념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진골 귀족들에 의해서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어려워지자 초야로 돌아가거나 지방의 호족 세력과 합세하여 사회 개혁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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