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삼국으로 이루던 나라로, 태봉은 901년에 궁예가 송악을 도읍 삼아 건국하였던 나라이다. 초창기에는 고구려를 있는다는 뜻으로 국호를 고려라고 했으나 이후 철원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바꾸게 된다. 당시 후삼국의 절반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궁예가 불교의 미륵 신앙에 빠져 신정국가를 추구하고 폭정을 일삼아 결국 918년에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축출되어 멸망하는 결과를 낳았다.
-태봉의 역사
건국 이전에 궁예는 892년 북원의 적괴였던 양길의 부하가 되어 그의 신임을 얻고 강원도 각지를 공략하는 한편 수년간 자기의 세력을 부식하고 임진강 일대를 공취하여 차차 독자적 기반을 닦아 898년에는 송악군에 웅거 하여 자립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다.
고려 더 자세히 말하면 후고구려 시기에 왕건이 궁예의 신하로 들어왔으므로 그에게 철원태수의 벼슬을 주고 양길에게 대항하게 하여 그 땅을 빼앗고 901년 스스로 왕이라 칭하며 나라의 이름을 고려라 명명하였다. 후고구려라는 명칭은 고구려, 고려와의 구분을 위한 명칭이며, 이 당시 국호는 고려라고 하였다. 당시 궁예는 신라에게 망한 고구려를 대신하여 복수한다고 호언하며 서북지방의 인심을 모으려고 하였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라 하였는데 신라의 관제를 참작하여 관제를 정하고 국가의 체제를 갖추어 갔다. 새 국호 마진은 마하진단의 약자이며 마하는 산스크리트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중국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후에 동방의 제국을 뜻하는 말이 되어갔다. 마진은 대동방국을 뜻하는 국호이며 905년 국도를 철원으로 옮기고 성책이라 개원하게 되었다. 911년 국호를 태봉이라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수덕만세라 개원, 914년 다시 정개라고 고쳤는데 궁예는 철원을 중심으로 하여 강원, 경기, 황해의 대부분과 평안, 충청의 일부를 점령함으로써 신라나 견훤의 후백제보다도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태봉은 계속 신라의 북쪽을 침범하는 한편 왕건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 방면으로부터 후백제를 침공하게 하여 진도. 고이도성을 격파하고 금성을 점령하게 되었는데 이 싸움으로 국토가 넓어짐에 궁예는 대규모의 궁궐을 건축하게 되고, 오행사상을 믿어 신라의 금덕에 이기고자 자기를 수덕으로 하였으며, 스스로를 미륵보살이라 칭하며 일상의 기거동작을 불심을 따르고 불교사상을 통하여 국가를 통치하려고 하게 되었다.
-태봉의 멸망
궁예의 호족 세력 견제와 촉정에 여러 측근들과 호족들은 전전긍긍하고, 마침내 918년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 4인이 의논하여 호족 세력의 대표 격인 왕건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궁예는 순식이 있는 명주성, 지금의 강릉으로 도피하는 도중 부양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따르면 보리이삭을 먹다가 백성들의 손에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기록은 승자인 고려왕조의 기록이며, 정사 이외의 궁예의 최후는 다소 다르게 전해지게 되었다. 포천 일대의 명성산에서 주둔하여 왕건의 추격군과 항전을 벌이게 되지만 수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 자결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육당 최남선이 기록한 철원지역의 궁예전설에서도 왕건에 쫓기다가 자결했다는 설도 또한 전해지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설로 궁예의 결론은 죽음을 맞이하고 이로 인해 태봉은 멸망을 맞이하게 되었다.
-번외
궁예는 신라 시대 왕가 서족 출신의 승려이자 태봉의 군주였다. 그는 신라 헌안왕, 경문왕과 후궁 사이에 태어난 서자였는데 그의 본래 속세 성은 김 씨, 본관은 경주,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선종이었다. 918년 왕건에게 축출되면서 시호는 남아있지 않다. 신라 왕실의 서자로 왕위계승권에서 밀려난 뒤 유모가 피신시켜 죽음을 모면했고 이후 세달사로 피신하여 승려로 살 수밖에 없었다. 신라 말기의 혼란기에 자립하여 사병을 모으고 장군이 되었다가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게 되었다. 뒤에 국호를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게 되었으나 스스로를 미륵으로 신격화하면서 신정적 전제 왕권을 강력히 추진해 호족들, 궁예의 태봉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불교 세력, 유학자들과 갈등하던 중 918년 시중 왕건과 그를 추대한 태봉에서 형성되고 성장한 직업 군인들, 왕건을 강력히 지지한 옛 고구려계의 패서 지역 호족들과 왕건을 지지한 유학자들에게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궁예의 죽음으로 태봉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궁예의 가족에 대해 왕비 강 씨가 있었다고 적고 있으며 신광과 청광이라 불린 아들은 강 씨 소생인 것으로 비정하는 데 이견이 없었다. 조정이 편찬한 기록 외에 후대의 광산 이 씨가 궁예의 첫째 아들 신광의 후손을 자처했으나 순천 김 씨 또한 둘째 청광의 후손을 자처하게 되면서 현재는 두 가문 모두 인정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애꾸눈에 승려라는 외모가 묘하게 재미있어서 인터넷 밈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인기 게임인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보스급 캐릭터인 시가트도 궁예와 똑같이 애꾸눈에 대머리인지라 같이 엮여서 인터넷 밈이 되는 경우도 많이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다양해지고 있다.
현재에 남아있는 태봉 도성 터는 현재 철원군 비무장지대 일대에 대부분 남아있어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조사가 어려운 안타까운 실정이 되어 있다.
'우리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일 신라의 모든 것 (0) | 2024.11.06 |
---|---|
한국의 빼놓을 수 없는 역사, 신라 (0) | 2024.11.05 |
고려의 교육 (0) | 2024.11.04 |
고려, 무신정권의 성립 그리고 몽골과의 전쟁 (0) | 2024.11.04 |
고려 사회의 성립 (0) | 2024.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