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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조선 후기, 전반적인 정치

by wanibini 2024.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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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궁안 연못

 

조선의 후기는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전후 복구를 위해 발행되기 시작한 공명첩 등은 신분제의 구분을 흐리게 하였고 조선 후기 지방의 양반 상당수는 가세가 기울어 일반 백성과 다를 바 없는 몰락 양반으로 반이라고 불리었다. 한편 상평통보가 본격적으로 유통되면서 상업 활동과 각종 산업이 발전하였고 비교적 재력 있는 양인들이 양반으로 신분상승을 꾀하여 17세기 후반 지역에 따라 10%~20%의 비율이 보이던 양반의 인구 구성비는 19세기 초에 이르면 30%~80%까지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양반은 각종 부역과 군역이 면제되었기 때문에 재력 있는 양인은 어떻게든 양반으로 등록되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의 신분제 혼란 중에는 노비 출신 후손이 면천과 공명첩을 통해서 양반으로 등록된 경우도 많이 있었다.

 

예송 논쟁은 국왕에게도 사대부의 가례를 강제하여 국왕 역시 성리학적 예법에 종속된 존재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신료들에 의한 관료제가 공고하게 굳어져 갔다. 숙종 시기 붕당은 전형적인 정치 활동의 형태로 굳었가고 있었다. 숙종은 각 정파와 때로 협력하고 때로는 견제하며 정치를 운영하여야 했다. 숙종은 환국을 통해 자신이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주도권을 갖고자 하기 시작했다. 장희빈의 등장과 죽음은 이러한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숙종 즉위 시기에 조선의 붕당은 점차 노론이 정치 운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태로 변화하여 갔고 이들의 영향력은 경종 시기 경종의 아우였던 연잉군을 전례에 없던 왕세자로 봉하게 되면서 절정에 달하게 되었다. 노론의 지지로 즉위한 영조는 지나치게 막강해진 노론을 견제하고자 탕평책을 제시가였고 후임인 정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왕세손으로 즉위하였고 정국은 벽파와 시파로 나뉘어 있게 되었다. 정조는 왕권이 보다 강화된 형태의 탕평책인 준론 탕평 정책을 실시하여 기존의 붕당 정치는 이에 따라 재편되어 갔다. 한편 노론 내부에서는 청나라와의 관계와 지방 양반의 지위 등이 배경이 된 호락논쟁이 일어나 또 다른 갈등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조선의 정치는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로 운영되었는데 조선 국왕은 이론적으로 전제 군주였으며 왕권과 신료의 권한이 긴장과 타협 속에서 조정되어 국정에 반영되어 갔다. 조선의 정치 체계와 구조는 경국대전으로 집대성 되어 관료 체제가 규정되었으며 다양한 층위의 논쟁과 갈등 속에 이를 실제적으로 적용하였고 조선 전기의 주요 갈등은 국왕과 신료들 사이의 권력 형성을 두고 일어났고 중기 이후 사림파의 등장은 붕당 정치의 발전으로 이어졌으며 후기의 호락논쟁과 같이 성리학의 이해에 대한 학문적 차이에서부터 붕당의 인맥과 실제 정치적 쟁점이 뒤섞인 독특한 정치 지형을 만들어 내었다고 한다.

 

19세기 세도정치가 들어서며 붕당 정치는 종결하게 되었고 세도정치는 정조가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시작하였으나 시작하였으나 정치권력이 혈연을 통한 특정 가문에 집중되면서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세도 정치 가문으로는 안동 김씨, 풍양 조 씨 등이 있으며, 60여 년 동안 지속된 세도정치 시기 조선은 안팎으로 많은 문제에 봉착하여 있었고 고종이 즉위하여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은 뒤 혁파되어 갔다.

조선 후기는 한편으로 여러 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이기도 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이양선이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서구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조선에까지 미치기 시작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전지구적인 소빙기의 영향으로 경신대기근이나 을병대기근과 같은 기근을 겪었다. 이에 조선의 제도에 따른 모순인 삼정의 문란이 더해지면서 임술농민봉기와 같은 민란이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다.

 

조선의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실학의 연구, 서락의 수용, 동학의 수립 등으로 전개되었으나 결국 해법을 찾지 못하다가 동학 농민 혁명으로 표출되었으나 외세가 개입된 진압으로 실패하였다. 외부적인 문제인 서양의 접근에 대해서도 척화비를 세우고 강경하게 거부한 흥선대원군의 척화론과 새로운 문물의 수용을 주장한 개화파의 갈등은 자주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통해 강압적으로 전개되면서 이후 위정척사파의 등장과 외세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가 일어나는 배경이 되어갔다. 안팎의 어려움이 쌓인 가운데 1897년 고종의 칭제건원으로 조선의 역사는 대한제국으로 승계되어 갔다.

 

조선은 이론적으로는 국왕이 절대적 주권을 지녔다는 점에서 전제군주제의 면모를 보이며 신료의 영향력 또한 크게 작용하는 관료제 사회였으나 양반을 기반으로 한 사대부 관료제는 국왕과 신료들의 통치 기구를 통하여 정치적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체제는 경국대전에 의해 규정되어 있었다. 국왕이 절대적인 전제 군주로 존중되었으며 신료를 장악하지 못하면 반정이 일어나거나 각종 역모와 반란이 발행하였기 때문에 국왕은 스스로를 절제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신료와 타협하여 협력하게 되었다. 조선은 건국부터 신진사대부에 의해 주도되어 왕권에 대한 견제와 재상권의 주도가 두드러진 가운데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의 국왕은 여러 차례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지만 신료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여 해결하기도 하였다. 왕자의 난은 정종을 앞세운 정도전의 재상권 우선 사상과 왕의 직접 통치를 이루고자 한 태종의 충돌이었으며, 이후에 시조의 찬위 역시 비슷한 충돌의 성격이 있었다. 조선은 전기와 중기, 후기에 따라 각각의 정치 잼점과 지형이 변화를 겪었으나 왕권과 신권의 긴장과 타협은 지속적인 정치의 주요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선의 전반적인 정치는 관료에 의해서 운영되었는데 관료의 선발은 대부분 과거 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과거는 문과, 무과, 그리고 각종 기술직을 선발하는 잡과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오던 승려 선발 시험인 승과는 조선 초까지 유지되었으나 숭유억불정책으로 없어지게 되었다. 관료의 선발에는 과거 제도 이외에도 유력한 인물이 추천하는 천거 하거나 공신이나 왕족의 자손에게 관직을 하사 나는 음서제 등의 방법이 있었지만 과거를 통한 선발이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고, 조선의 문인들은 음서 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보였으나 국왕과 고위 관료 모두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세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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