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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

조선 건국의 시작

by wanibini 2024.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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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건국

 

태조는 이름 없는 장군 시절에 고향에서 한 첫 번째 결혼으로 신의 왕후 한 씨에게서 이방과 이방의 여섯 아들을 두었고, 개경에서 두 번째 결혼으로 얻은 부인, 신덕왕후 강 씨에게서 이방번. 이방석 두 아들을 더 두었다.

나라를 세우고 태조는 둘째 부인을 현재 왕비로 삼고, 첫 번째 부인에게 설비의 시호와 제릉이라는 능로를 주어 추증 왕비로 올려 차비로 삼았으며 현재 왕비인 강 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왕자 중에서 왕세자를 선별하여 막내아들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이후 강 씨가 사망하여 태조 이성계가 강 씨를 왕후로 추종하니 비록 공식적으로 선포된 것은 아니나 결과적으로 첫째 부인은 후궁으로 내려가고 만 것이다. 이것이 태조의 개국 초 군권 분장 정책에 의해 왕자와 종친 및 공신들이 사적으로 가지고 있는 병사를 없애고자 했으며,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 부른다.

첫 번째 왕자의 난으로 강 씨가 낳은 왕세자 이방석과 부안군 이방번이 살해되고 한 씨가 낳은 둘째 아들인 이방과가 왕세자로 등극하였다가 한 달 뒤 즉위하니 그가 곧 정종이다. 반란의 주동자인 한 씨의 다섯째 이방원이 정종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은 난을 일으킨 이유가 장자만이 승계를 이을 수 있다는 법칙을 위한다는 명문으로 이복형제지만 친동생들을 살해한 퍠륜의 책임을 당장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으며, 장수로로써는 월등했으나 정치적 감각은 그보다 못한 형 정종에게서 자리를 물려받기 위해 계획되었다.

이후 정종을 압박하는 이방원의 행동에 여러 왕자가 분개하다가 그 중 이방원과 함께 왕세자 자리를 탐했던 이방간이 정종 2년(1400년) 음력 1월에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를 제압한 이방원 2월 25일에 새로 왕세자로 등극하여, 그해 11월 28일에 형인 종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왕위에 오르며 태종이 되었다.

첫 번째 왕자의 난은 이방원을 중심으로 한 첫 번째 왕비 신의왕후 한 씨 소생 왕자들이 다른 친인척과 종친들과 합세하여 이복동생이었던 세자 이방석 및 정도전을 포함한 아버지 태조의 측근들을 죽이는 사건이며, 두 번째 왕자의 난은 같은 배에서 난 동복 형제지간인 이방간과 이방원이 첫 번째 왕자의 난 때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하나의 수단으로 세워 놓은 정종의 자리를 놓고 벌인 전쟁이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나라의 기틀이 완벽하지 않은 건국 초여서 병권이 국가에 집중되지 못하였고, 군권 분장 정책에 의해 왕자들과 종친들이 절제사로 임명되어 각기 사사로운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 두 차례의 반란을 큰 원인 중 하나였다.

이 반란으로 왕위 서열 계승 문제가 정리되면서, 사사로운 병사들을 정리하고 모든 군대를 국가의 군대로 통합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마도 정벌은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을 침범하여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던 왜구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탈환한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1차 대마도 정벌은 1389년 고려 때 박위가 이끌었으며, 2차 대마도 정벌은 조선 태조 5년인 1396년에 있었다. 가장 유명한 3차 대마도 정벌은 1419년 세종 때 이종무가 이끈 정벌로, 기해 동정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국이라고도 부르며, 당시 대마도에서는 누카다케 전쟁이라고도 하였다.

쓰시마는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있어 중간의 연결 해주는 특수 사정도 있었지만, 본래 그 토지가 작고 토지가 척박하여 식량을 밖에서 구해야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고려 말부터 조공과 동시에 미곡을 받아 갔다. 그러나 그 땅의 기근이 들 때는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였으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복하게 되었다.

창왕 2년 음력 2월에 박위가 병선 백척을 이끌고 쓰시마를 공격하여 왜선 300여척을 불을 지르고, 노시태를 진 명하여 고려의 민간 포로 남녀 1백여 명을 구출하여 데려왔다.

태조 5년 음력 12월 문하 우정승 김사형이 오도 병마 처치 사가 외어 쓰시마를 정벌하였다.
태종 18년, 대마도에 큰 흉년이 들어 기근이 발생하자, 대마도인들이 명나라 해안을 탈취하고 약탈하여 가던 도중에 조선의 비인 것과 해주 해안을 약탈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대마도주인 소 사다시게 죽고 아들 소 사다모리가 그 지위에 올라 조선은 새 도주인 소 사다모리가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직접 대마도에 대한 전쟁을 논의하였고, 1419년 세종 1년 6월9일, 상왕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선포하게 되었다.

상왕이었던 태종의 지휘 아래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 도통사로 의정부 참 찬 최윤덕을 삼군 도 절제사로 명하고, 우박, 이숙묘, 황상을 중군 절제사, 유습을 좌군도 절제사 박초와 박실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을 우군 도 절제사로, 김을화와 이순몽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에 있는 병선 227척과 병사 1만7천 명을 거느리고 음력 4월에 출병하도록 하였다. 출병을 지시한 세종은 태종과 함께 한강 두모포에 거동해 연회를 베풀며 출정식을 가지게 되었다.

1419년 음력 6월 19일에 거제도 남쪽 조언 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쓰시마 섬에 이르게 외었는데 이종무는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고 왜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우고,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었다. 9일 후에 가옥 70여 호를 불태우고 명나라 사람과 조선일들을 구출하였다.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 지표에 주둔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7월 3일에 주력함대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 정벌을 시작한 지 13일 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철수시킨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이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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